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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마그누스)
    역사 서양 2023. 7. 30.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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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 왕 재직은 768-814년 26세 즉위. 46년간 통치한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체를 직접 창시한 인물인 오토 대제는 비록 카롤루스 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계로는 카롤루스 가문의 혈통을 자신이 이었음을 강조하며 자신의 황제위의 기반에는 카롤루스의 황제로써의 권위가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그 혈통 명분이 오토 대제의 신성 로마 제국 창건 명분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를 담당하였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카롤루스를 신성 로마 제국의 일종의 상징적인 초대 황제처럼 사람들이 여기게 된 형태이다.
    카롤루스는 "눈이 크고 눈빛은 활기를 띠고 있다. 코는 약간 길고, 머리는 금발이며, 표정은 쾌활하게 웃는 듯하다."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목소리가 가늘고 높은 편이었다고 전하며, 말을 급하게 할 때에는 더듬거리기도 했다고. 대식가이며, 구운 요리를 특히 좋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균형이 잘 잡힌 전사형이었다. 그는 중년에 약간 배가 나왔던 것을 빼면 평생 동안 젊은 시절의 몸매를 유지했다고 한다. 키가 매우 컸다고 전해지는데,192cm 장신으로 확인되었다. 사치스런 옷보다는 모피 상의에 푸른 망토를 걸치기를 좋아했지만 무기만은 고급 무기를 고집했다.
    카롤루스가 글을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실제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침대 베개 밑에 서판을 놔두고 자기 전에 꼬박꼬박 연습을 하며 상당히 노력했음에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서명은 공문서에 2개의 줄을 열십자로 긋는 것이었다
     라틴어를 유창하게[16] 말하고 들으며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중세 초중반 게르만 왕국의 전사왕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아군에게는 인자하고 관대하며 적에게도 대범하지만 일정 선을 넘어서면 잔인하고 무자비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호색한이기도 하여 여러 번 결혼도 하고, 자식도 많이 낳았지만 동시에 친딸들의 순결을 위해 결혼을 시키지 않는 등의 모습도 보였다. 전형적인 난세를 사는 영웅호걸의 성격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친딸들도 결혼만 안 했지 사생아는 많다고 한다.[17] 당시 중세인 기준으로 술을 적게 마시는 편이었다고 하는데, 하루에 딱 1잔만 마셨다고 한다. 다만 당시 중세의 술잔은 거짓말 좀 보태서 세숫대야 정도였으니 현대인 기준으로는 그래도 많이 마시는 편이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톨릭 교회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해 지방통치체계를 구축하기도 하고 무력을 동반한 집단 강제개종도 서슴치 않았지만, 동시에 이슬람 페르시아 아바스 왕조와는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맺었고 동로마 제국과는 정치적 입장에서 심한 분쟁의 소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적대시하지는 않는 등 정치적 감각도 상당했다.
    아들 넷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건왕 루트비히가 그의 뒤를 이었다.
    프랑크 왕국 동로마 제국과 비등한 하나의 제국으로 키워냈으며, 서로마 멸망 후 한동안 역사의 주변부로 전락했던 서유럽을 다시 서서히 역사의 중심 무대로 올라오게 하는 토대를 놓은 걸출한 군주이다. 당대 프랑크 왕국은 문화나 경제력 등의 소프트파워에 있어서는 기독교 세계의 종주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인구나 군사력 등의 하드파워에 있어서는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군사적 확장으로 서방 가톨릭 세계는 독자적인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고, 폐허나 다름없던 서방의 지적 풍토에 있어서도 문화적 부흥을 일으킨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 따라서 "서유럽이 카롤루스의 치세에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하였다."고 하는 게 고전적인 역사관이다. 이후 역사학자들은 카롤루스의 통치기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도 불렀다.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이탈리아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 대부분이 그에게서 기원했음을 고려하면[19(유럽의 아버지)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보니 유럽의 여러 왕국들은 카롤루스를 대제(大帝)라 불렀으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에서 찾았다.
    프랑스에서는 클로비스 1세와 함께 오랫동안 국부와도 같은 지위에 있었고 중세 이래 생성된, 중세 기독교 - 기사도 문학 구전에 의해 거의 신화적인 전설들로 포장되어 신격화되기도 했다. 서프랑크 카롤루스 왕조라면 당연한 말이고 카롤루스 왕조 직계가 끊어지자 이를 모계 계승으로 이은 카페 왕조 및 카페 왕조의 부계 분가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오를레앙 왕조 등은 전부 카롤루스 대제와 프랑크 왕국 역사를 자국 및 왕조의 주요한 선조 역사로써 매우 중시하였다.
    독일 방면에서는 물론 게르만계로서 독일 지역을 정복하고 게르마니아 토착 민족들인 색슨인, 튀링겐인, 프리스인, 알레마니인 등등을 정복 전쟁으로 모조리 정복한 뒤, 그 전부를 가톨릭 기독교로 개종시켜 하나의 집단 체제 안에 넣어 독일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태동시키게 한 카롤루스를 당연히 자국과 자국민들의 위인 중 하나로 여기긴 했지만 바로 그 카롤루스의 가장 주요한 침략 대상이 다름이 아니라 오늘날의 독일 땅과 그 땅의 토착 게르만계 민족들이었다는 점으로 인해 카롤루스에 대한 숭상이 중세 프랑스처럼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카롤루스와 프랑크 왕국 사람들은 이런 게르마니아의 토착 게르만 신화를 믿는 게르만계 민족들을 게르만 친척 내지 동족이 아니라, 죽든지 아니면 기독교로 개종하든지 택일해야 할 사악하고 어리석은 이교도 이민족들로 간주하고 있었고,
     독일인의 선조 게르만계 민족들을 도륙한 외세 정복자로서의 이미지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중세 시대에 서프랑크 동프랑크로 프랑크가 분열할 때에 이미 프랑크 제국에 대한 계승 의식을 프랑크로써의 정통성 계승은 카롤링거 왕가 직계가 가장 오랜 기간 잔존했던 서프랑크(=프랑스)[24]가 이었다고 보는 것이 거의 자타공인이었으며 반대로 제국으로써의 정통성 계승은 동프랑크(=독일)를 중심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건립하고 카롤루스의 모계 후손임을 주장한 오토 대제에 의해 독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역시 거의 자타공인이었다. 즉, 카롤루스의 유산은 프랑스와 독일 양쪽 모두에게 이어져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일인들은 카롤루스가 자국 위인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중 어느 쪽 위인에 가깝느냐라고 묻는다면 프랑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이 일반적이기도 하다. 이같은 독일인들의 카롤루스에 대한 시선은 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여론 조사를 통해 선정한 위대한 프랑스인 100인 위대한 독일인 100인 항목에서 카롤루스가 프랑스인 위인 100인에는 선정되었지만 독일인 위인 100인에는 선정되지 못한 것으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카롤루스가 정복한 북부 이탈리아와 이후 역사에서 프랑크 제국 체제에 오랜기간 속해있던 북부 이탈리아의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서 훨씬 부정적인 편이다. 현대 이탈리아인들의 경우에는 애초에 중세 초 프랑크족 지배층과 이탈리아인, 랑고바르드인 피지배층의 혼혈이 딱히 광범위하게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중세 초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프랑크인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조상의 일원이라기보다는 그저 이탈리아 반도를 스쳐지나간 한때의 정복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며, 또한 현대 이탈리아인들에게 있어서 프랑크 제국은 딱히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고대 로마에 대한 동경의 정서가 압도적이며 하다못해 로마가 아니더라도 랑고바르드 왕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지 프랑크에서는 거의 정체성을 찾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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