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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레 산티아고
    역사 서양 2023. 7. 2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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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는 1541년 건설된  칠레의 수도이다

    인구는 522 만명이고 칠레 중부 계곡에 위치해 있다.

    산티아고 분지에 처음으로 인간이 정착한 것은 1만년전이다. 수렵 채취 유목 생활을 한다

    이들은 안데스 산맥의 눈이 녹는 기간 동안 구아나코를 찾아 해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한다

    800년 마포초 강을 따라 농경 사회가 형성된다

    옥수수 감자 콩을 경작하고 낙타과의 라마속과 비쿠냐 속의 가축을 기른다

    1541년 스페인 정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도시를 건설한다

    발디비아가 여기에 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온화한 기후와 중앙을 횡단하는 마포쵸 강이 마푸체 인의 방어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건축물은 칠레 중부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오의 부족 중 하나인 피쿤체 족 사람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

    1810년에서 1818년에 일어난 칠레 독립 전쟁의 결과, 1818년에 베르나르 오이긴스, 호세 데 산 마르틴의 활약으로 칠레가 해방된다

     

     

    1. 예수 12사도중 하나인 대(大) 야고보[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 야고보 문서
     참고하십시오.
    Santiago el Mayor.

    예수의 12사도 중 한명인 야고보의 스페인어식 발음이 티아고(Tiago), 성(聖)을 뜻하는 산(San)을 붙인게 San Tiago 즉 산티아고이다. 스페인어권 남자 이름으로 흔한 디에고[1] 역시 같은 야고보를 뜻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가 아 산디에고를 영어식으로 읽은 이름으로 원래 이 도시는 스페인 콘키스타도르 바스코 데 발보아와 페드로 코로나도가 만든 도시이다.

    스페인어로는 성 야고보를 라틴어 표기인 Iacobus에서 유래한 '이아고(Iago)'라 하였는데 앞에 성인을 뜻하는 '산토(Santo)'이 붙으면서 '산토 이아고(Santo Iago)', 이것이 변하여 산트 이아고(Sant Iago), 산티아고가 되었다. 한마디로 성 야고보라는 뜻. 같은 말로 앞에 언급한 산디에고(San Diego)가 있다. 티아고(Tiago)나 디에고(Diego)라는 이름도 산티아고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야고보가 예수의 12제자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데, 그 이유는 야고보가 초기 기독교 선교 시절 이베리아 반도[2]에 와서 선교한 뒤 사후에 그의 시신이 스페인으로 다시 옮겨져 매장되었다는 전승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가 묻혀졌다는 지역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고 하여 가톨릭은 물론 여러 기독교 종파에서 성지로 칭송받고 있다. 스페인 북부 해안가를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유명하다. 가톨릭이 가장 유명하지만 타 교파들에서도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우리말로 '별빛 들판의 성 야고보'라는 뜻으로, 야고보의 시신을 발견한 사람이 신의 계시를 받고 별빛이 비추는 들판을 따라 걸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Compostela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 Campus Stellae의 변형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디에고, 산티아고는 스페인어권에선 사람 이름이나 지역 이름 등등으로 가장 사랑받는 이름중 하나다. 아래에 나온 지명이나 인명도 다 여기서 따온것.

    전설에 따르면 844년 있었다는 전설 속의 한 전투에서 패퇴 일보 직전인 기독교군의 전열에 갑자기 백마를 타고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휘두르며 강림하여 무려 5,000 명이나 되는 무어 병사들을 쳐죽여 전투를 구원했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스페인 쪽에선 정복과 군사, 나아가 스페인 전체의 수호 성인으로 존경 받는다.

    스페인/포르투갈의 재정복기인 레콘키스타 때에는 마타모로스[3], 아메리카 정복 시기에선 마타인디오스[4]로 공경받았다. 또한 국토회복운동 때는 스페인 병사들의 전투 함성 구호[5][6] 로 쓰였으며 국토회복운동이 끝난 후인 미국 남부/서부와 라틴아메리카 등 신대륙으로 간 콩키스타도르 기병대에서는 이 함성 구호를 썼다.

    현재 칠레 수도인 산티아고 시와 쿠바 제2도시인 산티아고 데 쿠바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 남서부의 샌디에이고 등의 이름이 모두 이 성 야고보에서 온 이름이다. 셋 다 스페인 땅이었고 스페인 개척자들이 세운 도시이다.[7]
    산티아고는 칠레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 남아메리카에서도 손꼽히는 큰 도시이다. 칠레에서 인구가 가장 밀집한 지역인 산티아고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중심지로 총인구가 8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며, 이 중 600만 명 이상이 도시의 지속적인 도시 지역에 살고 있다. 그 도시는 완전히 칠레의 중앙 계곡에 있다. 도시의 대부분은 해발 500~650m에 위치해 있다.

    1541년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페드로 데 발디비아에 의해 설립된 산티아고는 식민지 시대부터 칠레의 수도였다. 도시는 19세기 신고전주의 건축의 중심지와 구불구불한 샛길을 가지고 있으며, 아르 데코, 네오 고딕, 그리고 다른 스타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산티아고의 도시 풍경은 여러 개의 독립된 언덕과 빠르게 흐르는 마포초 강에 의해 형성되며, 파크 포레스트랄과 발마세다 공원과 같은 공원이 줄지어 있다. 안데스 산맥은 도시의 대부분의 지점에서 볼 수 있다. 이 산들은 특히 겨울 동안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스모그 문제에 기여한다. 도시 외곽은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티아고는 산과 태평양 모두에서 1시간 이내에 있다.

    산티아고는 칠레의 정치, 금융의 중심지이며 많은 다국적 기업의 지역 본부가 있는 곳이다. 칠레의 행정부와 사법부는 산티아고에 있지만, 의회는 대부분 인근 발파라이소에서 열린다. 산티아고는 성서 인물인 대 야고보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도시는 2023년 팬아메리칸 게임을 개최할 것이다.

    2. 명명법[편집]

    칠레에는 "산티아고"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실체가 있는데 종종 혼동된다. 산티아고 코뮌은 산티아고 중부에 위치한 행정 구역으로, 주로 산티아고 중심부에 위치한다. 산티아고 시가 관리하고 시장이 이끄는 이 코뮌은 주 대표단이 이끄는 산티아고 주의 일부로, 주지사가 이끄는 산티아고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하위 구역이다. 시장과 주지사는 일반 투표로 선출되지만, 지방 대표는 공화국 대통령에 의해 지역 대표로 지정된다.

    이러한 분류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라는 용어가 다른 설명 없이 사용될 때, 그것은 보통 산티아고 프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티아고 코뮌과 40개 이상의 다른 코뮌을 포함하는 도시 연속성에 의해 정의된 대도시 지역인 그레이터 산티아고(그란 산티아고)로도 알려진 것을 가리킨다. 빈스와 인근 지방의 일부 지역 도시의 지속적인 확장과 작은 도시와 농촌의 흡수 때문에 이 수도권의 정의는 진화해 왔다.

    산티아고라는 이름은 1541년 스페인인 정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도시를 세울 때 선택한 이름에서 유래했다. 발디비아는 스페인 수호성인인 하메스 대제를 기렸다. 스페인어에서 이 성인의 이름은 디에고, 하이메, 야코보, 산티아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마푸체어는 "산티아고"라는 이름을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발디비아는 "산티아고 델 누에보 엑스트레모" 또는 "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가 식민지로 예상한 영토와 그의 고향인 에스트레마두라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이름이다. 그 이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결국 칠레의 현지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산티아고라고 불리는 다른 도시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이 남미의 도시는 때때로 스페인어와 다른 언어로 "산티아고 데 칠레"라고 불린다.

    도시와 지역의 이름은 산티아구이노스(남성)와 산티아구이나(여성)이다.

    3. 역사[편집]

     

    3.1. 선사 시대[편집]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최초의 인류 집단이 기원전 1000년에 산티아고 분지에 도달했다고 믿어진다. 그 무리들은 주로 유목민 수렵 채집자들이었는데, 안데스 산맥의 눈 녹는 시기에 구아나코를 찾아 해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했다. 800년경에는 마포초 강변에 옥수수, 감자, 을 중심으로 한 농업 공동체가 형성되고 낙타들이 이 지역에 가축화되면서 최초의 정착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피쿤치족(칠레인이 붙인 이름)이나 프로마우카족(잉카인이 붙인 이름)에 속한 지역에 세워진 마을들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잉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잉카인들은 미티마스 계곡에 정착했고, 주요 설치물은 현 도시의 중심에 정착했으며, 후아카 데 체나와 엘 플로모 언덕의 성소와 같은 요새가 있었다. 이 지역은 실패한 잉카 원정대의 근거지로서 잉카 트레일로 남하할 수 있었다.

    3.2. 도시 건설[편집]

    프란시스코 피사로 페루에서 파견하고 쿠스코에서 먼 길을 떠난 에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콩키스타도르 페드로 데 발디비아는 1540년 12월 13일 마포초 계곡에 도착했다. 발디비아의 숙주들은 투파휴 언덕의 비탈진 강가에 진을 치고 이 지역에 살던 피쿤체인들과 서서히 교류하기 시작했다. 발디비아는 이후 이 지역의 수장들을 의회에 불러들여, 스페인 카를로스 1세를 대신하여 누에바 에스트레마두라 총독의 수도가 될 도시를 세우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다. 원주민들은 우엘렌이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 옆에 있는 강의 두 갈래 사이의 작은 섬에 마을을 설립할 것을 수락했고 심지어 추천하기도 했다.

    1541년 2월 12일, 발디비아는 공식적으로 우엘렌 강 근처에 산티아고 델 누에보 에스트레모(누에바에스트레마두라의 산티아고)라는 도시를 세웠다. 식민지 지배 이후, 발디비아는 도시 격자 배치를 설계할 마스터 건축가인 페드로 데 감보아에게 새로운 도시의 배치를 맡겼다. 감보아는 도시의 중심에 플라자 시장을 설계했고, 그 주변에는 대성당과 주지사의 집을 위한 다양한 부지가 선택되었다. 총 8개의 블록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10개의 블록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어졌다. 각 태양 블록은 진흙과 짚으로 집을 지은 정착민들에게 주어졌다.

    발디비아는 몇 달 후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떠나 아라우코 전쟁을 시작했다. 산티아고는 보호받지 못한 채로 남겨졌다. 미치말론코의 토착민 숙주들은 이를 이용해 신생 도시를 공격했다. 1541년 9월 11일, 도시는 원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55명의 스페인 수비대는 요새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저항군은 발디비아의 정부였던 이네스 데 수아레스가 이끌었다. 그들이 점령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는 모든 원주민 포로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의 머리를 창살에 대고 몇 개의 머리를 원주민들에게 던졌다. 이 야만적인 행동에 맞서 원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 이 도시는 천천히 재건되어 1565년 칠레 왕립 오디엔차(Audiencia)가 설립된 콘셉시온(Concepción)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라우코 전쟁과 일련의 파괴적인 지진 때문에 콘셉시온이 직면한 지속적인 위험은 1607년까지 산티아고에 왕궁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기득권층은 수도로서의 도시의 역할을 재확인했다.

    도시의 초기 몇 년 동안 스페인인들은 심각한 식량과 다른 공급 부족에 시달렸다. 그 원인은 현지 원주민 피쿤체가 재배를 중단하고 더 먼 곳으로 후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지원군으로부터 격리된 스페인군은 그들이 발견한 모든 것을 먹기 위해 의지해야 했고, 옷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부 스페인인들은 , 고양이, 바다사자, 여우 등의 가죽으로 옷을 입기 위해 왔다.

    3.3. 식민지 시절[편집]

    초기 산티아고는 원주민들의 공격, 지진, 홍수로 인해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도시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558년 감보아가 설계한 126개의 블록 중 40개가 점유되었고, 1580년 도시의 첫 번째 주요 건물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는데, 1561년 첫 대성당의 초석이 놓였고, 1572년 샌프란시스코 교회의 건축이 두드러졌다. 이 두 건축물은 주로 어도비와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요한 건물의 건설뿐만 아니라 인근 토지가 수만 마리의 가축들을 환영하면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1590년, 1608년, 1618년 마포초 강 범람, 1647년 5월 13일 대지진으로 600명 이상이 사망하고 5,000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들은 국가의 모든 권력이 아르마산티아구이나 광장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칠레의 대장성의 수도의 성장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1767년, 총독 루이스 마누엘 데 자냐르투는 식민지 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 공사 중 하나인 칼리칸토 다리를 건설하여 도시와 강의 북쪽에 있는 라 침바를 효과적으로 연결하고, 마포초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건설업자들은 다리를 완공할 수 있었지만, 교각은 끊임없이 강물에 의해 손상되었다. 1780년, 총독 아구스틴 데 호레귀는 이탈리아의 건축가 호아킨 토스카를 고용하여 대성당의 정면, 라 모네다 궁전, 산 카를로스 운하, 암브로시오 오히긴스 정부 시절 제방의 최종 건설을 설계하였다. 이 중요한 작품들은 1798년에 영구적으로 개방되었다. 1791년 오히긴스 정부는 발파라이소로 가는 도로의 개통도 감독했다.

    3.4. 공화국의 수도[편집]

    1810년 9월 18일 산티아고에서 제1차 정부로 선포되어 칠레의 독립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국가의 수도가 된 그 도시는 다양한 사건들, 특히 근처의 군사행동으로 위협받았다.

    파트리아 비에자에는 국립연구소와 국립도서관과 같은 몇몇 기관들이 설치되었지만, 1814년 랑카과 전투에서 애국자가 패배한 후 문을 닫았다. 왕정은 1817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때 안데스군은 차카부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산티아고의 애국자 정부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독립은 보장되지 않았다. 스페인군은 1818년에 새로운 승리를 거두어 산티아고로 향했지만, 1818년 4월 5일 마이푸 전투에서 마이포 강 평야에서 행군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베르나르도 오히긴스는 최고 책임자로 받아들여졌고,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도시를 위한 많은 중요한 일들을 시작했다. 파트리아 누에바와의 통화 동안 폐쇄된 기관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일반 묘지가 문을 열었고, 산 카를로스 운하 공사가 완료되었고, 라 카냐다로 알려진 마포초 강의 남쪽 팔에는 한동안 매립지로 사용되었던 건조 강바닥이 지금은 알라메다 데 라 델리아스로 알려진 대로로 바뀌었다.

    1822년 11월 19일, 1835년 2월 20일 2차례 지진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도시의 급속한 지속적인 성장을 막지 못했다. 1820년에 인구는 46,000명이었고 1854년에는 69,018명에 달했다. 1865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15,33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현저한 증가는 수도의 남쪽과 서쪽,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 지역에 존재했던 오래된 부동산의 분할에서 성장하는 활기찬 지역인 라 침바에 대한 교외 성장의 결과였다. 이러한 새로운 주변부 개발은 이전에 도심을 지배하던 전통적인 체커보드 구조를 종식시켰다.

    3.5. 19세기[편집]

    공화정 시대에는 칠레 대학교(Universidad de Chile), 사범학교, 미술공예학교, 퀸타 노멀 등의 기관들이 설립되었는데, 여기에는 미술박물관(현 과학기술박물관), 국립자연사박물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로 교육용으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그 기간 동안 공공 계획의 예가 되었다. 1851년 수도와 발파라이소 항을 연결하는 최초의 전신 시스템이 개통되었다.

    수도의 도시 개발의 새로운 기세는 소위 "자유공화국"과 시장 벤자민 비쿠냐 마켄나의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났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들 중 하나는 중앙 위치에도 불구하고 수리 상태가 좋지 않았던 세로 산타 루시아의 리모델링이다. 산티아고를 개조하기 위해 비쿠냐 마켄나는 도시 전체를 둘러싼 도로인 카미노 데 신투라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알라메다 애비뉴의 새로운 재개발은 그것을 도시의 주요 도로로 바꾸었다.

    또한 1873년 유럽의 조경가들의 작업과 함께 오히긴스 공원이 생겨났다. 대중에 개방된 이 공원은 큰 정원, 호수, 그리고 마차 길 때문에 산티아고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테아트로 시립 오페라 하우스와 산티아고 클럽과 같은 다른 중요한 건물들이 이 시대에 문을 열었다. 같은 시기에 1875년 국제 박람회가 퀸타 노멀 경기장에서 열렸다.

    도시는 국가 철도 시스템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최초의 철도는 1857년 9월 14일 산티아고 에스타시온 중앙역(Santiago Estación Central railway station)에 도착했다. 이 역은 1884년에 완공되었다. 이 기간 동안 철도는 발파라이소와 칠레의 북쪽과 남쪽 지역을 연결했다. 1875년까지 산티아고에는 1,107대의 철도 차량이 있었고, 45,000명의 사람들이 매일 트램 서비스를 이용했다.

    3.6. 산티아고의 100주년[편집]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 함께, 도시는 산업의 강력한 발전과 관련된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발파라이소는 그동안 국가의 경제 중심지였던 발파라이소가 수도를 희생하면서 서서히 유명세를 잃었다. 1895년까지 국가 제조업의 75%가 수도에 있었고 항구 도시에는 28%에 불과했으며, 1910년에는 주요 은행과 상점들이 발파라이소를 떠나 도심 거리에 설치되었다.

    자치시법의 제정으로 지방 자치 단체들은 당시 산티아고 데파르테노를 중심으로 다양한 행정 구역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891년에는 마이푸, 누뇨아, 렌카, 람파, 콜리나, 1897년에는 프로비덴시아, 바라카스, 1901년에는 라스콘데스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1891년 라 빅토리아 데파르트망(La Victoria departmento)은 로 카냐스(Lo Cánas)가 설립되면서 분리되었고, 1892년 라 그란자와 푸엔테 알토, 1899년 라 플로리다, 1925년 라 시스터나로 분리되었다.

    이 시기의 산 크리스토발 언덕은 긴 개발 과정을 시작했다. 1903년에 천문대가 설치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14m 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을 위한 첫 번째 돌을 놓았는데, 오늘날에는 도시의 다양한 지점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당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완공되었다.

    1910년 칠레 100주년 기념행사와 함께 많은 도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철도망이 확장되어 도시와 초기 교외를 새로운 철도로 연결하고 카혼델마이포까지 가는 노선이 신설되었으며, 도시 북쪽에 새로운 철도역인 마포초역이 건설되었다. 마포초 강 남쪽에는 파르크 숲이 조성되고 미술관, 바로스 아라나 공립 기숙학교, 국립도서관 등의 새로운 건물이 문을 열었다. 게다가, 이 작업은 도시 인구의 약 85%를 포함하는 하수 시스템을 포함할 것이다.

    3.7. 인구 폭발[편집]

    192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산티아고 인구는 507,296명으로 칠레 인구의 13.6%에 해당한다. 이는 1907년 인구 조사보다 52.5% 증가한 것으로, 연간 성장률은 3.3%로 국가 수치의 거의 3배에 달했다. 이러한 성장은 주로 건설 중인 공장과 철도로 일하러 온 남부에서 온 농부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마을 자체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경험되었다.

    이 시기에 도심 지역은 상업, 금융, 행정 중심지로 통합되었고, 아후마다 거리 주변에는 다양한 포털과 지역, 라 모네다 궁전 주변에는 시민구가 설치되었다. 후자의 사업에는 부처의 사무실과 기타 공공 서비스의 설치를 위한 다양한 모더니즘 건물들의 건설과 중층 건물의 건설이 포함되었다. 반면에, 센터의 전통적인 거주자들은 과두정치와 유럽 이민자들을 수용한 프로비덴시아와 누뇨아, 그리고 중산층 가족을 위한 산 미겔과 같은 더 많은 시골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또한 주변 별장에는 당시의 다양한 단체들의 다양한 파트너들이 세워졌다. 1928년 로스 세릴로스 공항의 개항, 전화망의 확장, 첫 번째 극장의 등장과 함께 도시의 현대성은 확장되었다.

    20세기 초가 기술의 발달로 경제성장의 시대였다는 느낌은 하층사회의 생활수준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전 수십 년의 성장은 1929년에 시작된 전례 없는 인구 폭발로 이어졌다. 대공황으로 북부 지역의 질산염 산업이 붕괴되면서 6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고, 이는 농업 수출 감소에 더해 전국적으로 약 3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실업자들은 산티아고와 그 번창하는 산업을 살아남을 유일한 기회로 보았다. 많은 이주민들이 아무것도 없이 산티아고에 도착했고 수천명은 빌릴 수 있는 장소를 찾는 데 큰 어려움 때문에 거리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결핵을 포함한 광범위한 질병이 수백 명의 노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산티아고 인구의 급여가 하락하는 동안 실업과 생활비는 극적으로 증가했다.

    상황은 몇 년 후 CORFO에 의해 촉진된 새로운 산업 붐과 1930년대 후반부터 국가 기구의 확장으로 바뀔 것이다. 이때 귀족의 권력은 상당 부분 상실되었고 상인, 관료, 전문직 종사자로 구성된 중산층이 국가 정책을 수립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티아고는 상당한 중산층과 하층민의 인구를 증가시키기 시작했고, 반면에 상류층은 수도의 구역으로 피난처를 찾았다. 따라서, 쿠시노와 알라메다 공원으로의 오래된 돈 많은 클래스 여행은 1938년에 국립 경기장과 같은 인기 있는 오락 장소들에 대한 헤게모니를 잃었다.

    3.8. 그레이터 산티아고[편집]

    이후 수십 년간 산티아고는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 성장하였다. 1940년 도시의 인구는 952,075명이었고, 1952년 이 수치는 1,350,409명으로 증가했고, 1960년 인구 조사는 총 1,907,378명의 산티아구이노를 기록했다. 1930년 도시 면적은 6,500헥타르로 1960년에는 20,900헥타르에 달했고 1980년에는 38,296헥타르에 달했다. 대부분의 공동체가 계속 성장했지만, 주로 서쪽의 바라카스, 북쪽의 콘찰리, 남쪽의 라 시스테르나, 라 그란야와 같은 외곽 공동체에 집중되어 있다. 상류층의 경우, 그것은 라스 콘데스와 라 레이나 섹터의 구릉 지대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센터는 무역, 은행, 정부의 발전을 위한 더 많은 공간을 남겨두고 사람들을 잃었다.

    성장의 규제는 1960년대에 훨씬 더 큰 도시의 새로운 현실을 반영하는 개념인 그레이터 산티아고에 대한 다양한 개발 계획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시행되기 시작했다. 1958년 산티아고 공동체 간 계획이 발표되었다. 제안된 계획은 최대 인구 3,260,000명의 도시 및 준헥타르로 제한했으며, Americo Vespucio Avenue와 Panamericana 5번 도로와 같은 새로운 도로 건설 계획, 그리고 '산업 벨트'의 확장 계획을 포함했다. 1962년 월드컵의 기념행사는 도시 개선 계획을 실행하는 데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1966년 산티아고 메트로폴리탄 공원이 세로 산 크리스토발에 설립되었고, MINVU는 판자촌을 없애고 새로운 집을 짓기 시작했다. 마침내, 에디피오 디에고 포르탈레스가 1972년에 건설되었다.

    1967년에 푸다우엘의 새로운 국제 공항이 문을 열었고, 수년간의 논의 끝에 1969년에 산티아고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알라메다 강의 서쪽 부분 아래에 있었고 1975년에 개통되었다. 지하철은 그 도시에서 가장 권위 있는 건물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것은 계속 확장되었고 1978년 말까지 2개의 수직선이 설치되었다. 통신 인프라 구축도 이 시기의 중요한 발전으로 1975년 건설된 이후 20년 동안 수도의 상징 중 하나이자 전국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 되었다.

    1973년 쿠데타와 군사정권 수립 이후 도시계획의 큰 변화는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을 채택한 1980년대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1979년에 기본 계획이 수정되었다. 도시 지역은 부동산 개발을 위해 62,000ha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 스프롤 현상이 발생했으며, 특히 La Florida에서는 1990년대 초에 도시의 크기가 40619ha에 달했다. 199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산티아고는 328,881명의 인구를 가진 이 나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한편, 1985년 3월 3일 강력한 지진이 도시를 강타했다. 비록 사상자는 거의 없었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집을 잃게 했고 많은 오래된 건물들을 파괴했다.

    3.9. 21세기 초의 대도시[편집]

    1990년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시작되면서, 산티아고 시는 300만 명의 인구를 넘어섰고, 대부분이 남쪽에 거주했다: 라 플로리다는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고, 푸엔테 알토와 마이푸가 그 뒤를 이었다. 퀼리쿠라와 페날롤렌과 같은 지방 자치체들의 부동산 개발은 주로 중산층 가정을 위한 주택 프로젝트의 건설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고소득 가정들은 현재 바리오 알토라고 불리는 구릉 지대로 이주하여 라스 콘데스의 인구를 증가시키고 비타쿠라와 로 바르네치아와 같은 새로운 공동체를 낳았다.

    프로비덴시아 애비뉴 지역은 동부 지역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 개발은 바리오 알토까지 확장되어 고층 빌딩을 건설하는 데 매력적인 장소가 되었다. 주요 회사들과 금융 회사들이 이 지역에 세워졌고, 이것은 샌하탄으로 알려진 번영하는 현대 비즈니스 센터를 낳았다. 이 회사들이 바리오 알토로 떠나고 도시 전역에 쇼핑센터가 건설되면서 도심에 위기가 생겼다. 이 지역을 재창조하기 위해, 주요 상가는 파서 아후마다와 같은 보행자 통로로 바뀌었고, 정부는 주거용 건물 건설에 대한 세제 혜택을 도입하여 청년들을 끌어들였다.

    도시는 무질서한 성장으로 인한 일련의 문제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겨울 동안 대기오염이 위험 수준에 도달했고 스모그 층이 도시 전체에 정착했다. 당국은 산업 오염을 줄이기 위한 입법조치를 채택하고 차량 사용을 제한했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남동부 지역에 지하철이 크게 확장되고 노선이 연장되었으며 3개의 노선이 새로 건설되었다. 2011년에 마이푸로 가는 새로운 연장이 개통되었고, 메트로폴리탄 철도의 총 길이는 105km였다. 버스의 경우 1990년대 초에 대대적인 개혁을 거쳤다. 2007년에 트란산티아고라는 마스터 플랜이 수립되었다. 출시 이후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산티아고에서는 급속한 발전이 계속되었다. 시빅 구는 공화국 수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시우다다니아 광장이 조성되고 시우다드 공원 비첸테나리오가 건설되면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높은 빌딩의 개발은 동부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코스타네라 센터 단지에 티타늄 라 포르타다와 그란 토레 산티아고 마천루의 개장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지구 사회적 분열은 도시와 국가 모두에서 가장 중요한 2가지 문제로 남아 있다.

    2010년 2월 27일, 강진이 수도를 강타하여 오래된 건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일부 현대 건물들은 거주할 수 없게 되어, 산티아고의 현대 건축에서 의무적인 지진 기준의 실제 구현에 대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4. 지리[편집]

    이 도시는 산티아고 분지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산지로 둘러싸인 넓고 비옥한 땅으로 이루어진 큰 사발 모양의 계곡이다. 도시의 해발고도는 다양하며, 점차적으로 서쪽 지역의 400m에서 동쪽 지역의 700m 이상으로 올라간다. 서쪽의 산티아고 국제공항은 해발 460m에 위치해 있다. 중앙 근처에 있는 바케다노 광장은 570m(1,870피트)에 위치해 있다. 에스타디오 산 카를로스 데 아포킨도는 도시의 동쪽 끝에 있으며 해발 960m이다.

    산티아고 분지는 중저기압의 일부이며, 눈에 띄게 평평하며, 단지 몇 개의 "섬 언덕"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 분지는 남북 방향으로 약 80km, 동서 방향으로 약 35km이다. 마포초 강이 도시를 통과한다.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 서쪽으로는 칠레 해안 산맥과 접한다. 북쪽으로는 안데스 산맥의 산맥인 코르돈 데 차카부코 산맥과 접한다. 남쪽 국경에는 안데스 산맥의 긴 봉우리인 앙고스투라 데 파인이 있다.

    도시와 인접한 산맥은 시에라 데 라몬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 라몬 단층의 지각 활동으로 인해 형성되었다. 이 범위는 세로 데 라몬에서 3296m에 이른다. 시에라 데 라몬은 안데스 산맥의 프레코르딜레라를 상징한다. 동쪽으로 20km 떨어진 곳은 안데스 산맥의 코르디예라로, 6,000m가 넘는 산과 화산이 있고 빙하가 존재한다. 가장 높은 산은 해발 6,570m의 투풍가토 산이다. 다른 산으로는 투풍가티토, 산호세, 마이포 등이 있다. 세로 엘 플로모는 산티아고 도시 지역에서 보이는 가장 높은 산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도시 성장은 도시의 경계를 넘어서 안데스 프리코르딜레라의 경사면을 따라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La Dehsa, Lo Curro, El Arrayan과 같은 지역에서는 고도 1,000m 이상에서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산티아고의 자연 식생은 서쪽의 바켈리아 동굴[1]과 프로소피스 칠렌시스(Prosopis chilensis)의 가시덤불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의 안데스 산맥 기슭을 중심으로 바켈리아 동굴과 바카리스 파니쿨라타가 연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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