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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02년 터키 스미르나 전투, 티무르의 승리
    역사 서양 2023. 7. 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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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미르나는 지금의 튀르키예 이스마르이다

    터키 서부 지역으로 사르디스의 서쪽에 위치하며 서부 해안 도시 에페소의 북쪽이다

    에게 해변의 전략적인 요충지에 이오니아인들이 만든 도시이다

    방어가 용이하고 내륙과의 연결이 좋은 그리스 식민지 항구 도시이다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은 튀르키예 제3의 도시이다.

    성경 요한 묵시록에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중 하나인 스미르나 교회가 소재했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수백년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오스만 제국이 망국에 다다른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도시 인구의 절반인 15만 명이 그리스인이었다.오스만 제국 시절 이 도시의 별칭은 바로 이교도 이즈미르(Gavur İzmir)였다.

    주변에 페르가몬 유적이 있고, 남쪽에 에페소스(셀축), 북쪽에 트로이(차낙칼레)가 있다

     

    1402년오늘날 터키의 수도 앙카라 근처의 추부크 평원(Çubuk Ovası)에서 티무르 티무르 제국 바예지트 1세 오스만 술탄국이 맞붙은 대회전. 티무르 일생의 마지막 회전이자 막 전성기에 접어든 오스만 술탄국에 일격을 가해 오스만의 팽창을 반세기 이상 뒤로 밀어내며 동로마 제국의 수명도 덤으로 늘려준 전투가 앙카라 전투이다. 앙고라 전투라고도 부른다.

    1402년,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트 1세는 권세의 절정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2제국, 그리스 북부 일대를 완전히 제압했으며,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 공국까지 공략해 들어갔다. 비록 왈라키아 공작 미르체아 1세가 1만 명만을 이끌고 오스만군 5만여 명[1]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북진을 저지했지만(로비네 전투), 그의 군대 역시 피해를 입었기에 헝가리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유럽 각국은 서유럽에 지원을 요청, 십자군을 형성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이 또한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완파당했다. 바예지트 1세는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아나톨리아 일대의 튀르크계 공국들을 하나하나 제압해 나갔다.

    비록 1394년부터 시작해 8년여를 끈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은 아직도 가망이 없었지만 그런 것쯤은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오스만은 기세등등한 상태였다.[2] 문제는, 오스만의 동쪽에는 이런 기세를 훨씬 능가하는 희대의 정복자가 한 명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중앙 아시아의 티무르다

     

    한편 동쪽의 정복자 티무르 자신의 제국을 한창 완성시켜 나가는 중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 사마르칸트에서 처음 거병하여 30여 년 동안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워 이긴 끝에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에서 동쪽으로는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는 다음 목표인 서아시아 평정을 위해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편 그 무렵 바예지트는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공국들 대부분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이 이르렀으니 전성기를 누리는 이슬람 세계의 두 강국이 서로 국경을 맞대게 된 상황에서 티무르와 바예지트, 두 사람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해 중앙 아시아,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북부및  페르시아 동쪽을 장악하고 서진 중이고 오스만 제국은 터키 아나톨리아에서 발원해서 발칸반도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페르시아 서쪽을 장악하고 동진 중이니 두 거대 세력이 부딪치게 된다

    오스만과의 전쟁에 앞서 티무르는 캅카스 조지아를 공격했으며 이 조지아 원정은 티무르에게 간만에 '지하드' 의 기쁨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조지아 원정을 마치자마자 티무르는 곧바로 동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왔고 이번에야 말로 티무르와 결판을 내기로 결심한 바예지트는 수년 동안 계속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마저 포기한 후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중부 아나톨리아의 요충지인 앙카라에 도착한 오스만의 바예지트는 참모들과 향후 전략에 대해 논의했는데 참모들은 방어와 감시에 유리한 이곳 앙카라에서 티무르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간언했으나 바예지트는 티무르의 군대가 아나톨리아 평원 깊숙히 들어오기 전에 국경의 산지에서 요격하자고 주장했고 앙카라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후 동쪽 시바스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사이 티무르는 기동력이 뛰어난 자신의 군대의 강점을 이용해 카이세리로 우회하여 비밀리에 오스만 영토 안으로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는데 성공해 바예지트의 허를 제대로 찔렀고 곧바로 티무르는 대군을 이끌고 앙카라에 나타나 앙카라를 포위했다, 앙카라를 포위하며 여유롭게 바예지트를 기다리던 티무르는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전속력으로 회군하느라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며 진이 빠진 오스만군을 맞이한다.
    티무르군을 10만, 오스만군을 8만 5천으로 추정하고 있다.
    티무르군은 시리아 원정에서 얻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전력을 최대한 증강시켰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크계 공국들의 전력을 끌어모아 티무르의 지휘 경력상 최대 규모의 군대를 편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력은 투르크-몽골 계열의 경기병이었으며, 인도 원정에서 획득한 다수의 전투 코끼리 또한 편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보병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스만군의 혼성 부대 중 튀르크계 공국들에서 파견한 병사들의 이탈이 계속되면서 결국 자중지란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 튀르크군 뿐만 아니라 오스만군의 중핵이었던 시파히까지 티무르군에 항복하기 시작하자 오스만군의 붕괴는 더이상 막을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패주하기 시작한다.
    오스만의  바예지트 1세는 도주를 기도했으나 실패, 포로로 잡혔다. 단 하루 만에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던 오스만 술탄국의 주력 군대가 힘 한번 못써보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  
    시파히(사파히) 는 병사, 군인을 말한다. 중세 유럽에서 기사에 해당된다.  소집될 때 급료 대신 일정한 봉토에서의 징세권을 준다
    오스만 제국의 상비군 기병이지만, 같은 상비군 기병인 카프클루의 기병과는 다른 별개의 기병이다. 예를 들면 유사시에 하나의 지역으로부터 기병을 소집하려면 스파히와 카프클루의 기병이 동시에 따로 따로 소집되었다.
    주로 경장 기병이고 약탈을 주로 목적으로 하므로 사기가 낮고 패색이 짙으면 도망가기 바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포로 무장한 예니체리와 다른 상비군 기병 중무장의 카프클루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의 군대는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였던 부르사는 힘없이 문을 열었으며, 그외의 여러 요새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술탄국은 아나톨리아 남부 대부분을 상실한다
    바예지트 1세는 이듬해 감옥에서 사망하는데, 병사라는 말도 있고 자결이라고도 전한다.
    이후 바예지트의 넷째 아들로서 다른 형제들을 모두 제거한 메흐메트 1세가 내전의 후유증을 어느 정도 치유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로 뒤를 이은 무라트 2세가 내전의 뒷수습을 마친 뒤 다시 한 번 확장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다시 뒤를 이은 메흐메트 2세 때인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제국의 기틀을 다졌는데, 이 때는 앙카라 전투로부터 51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티무르는 한번의 전투로 승부를 마무리짓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그러나 티무르답게 이 지역을 온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행보는 전혀 보이지 않고 막대한 약탈품을 챙겨 사마르칸트로 귀환한다.
    이후 3년 뒤 티무르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직전에 사망한다. 이후 앙카라 전투에서 각 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티무르의 자식들과 손자들 간의 내분으로 티무르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몽골인의 관습 때문이었다.  샤 루흐가 티무르 사후 혼란을 수습했지만 샤 루흐 사후 티무르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져 붕괴해버리고 만다.칭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몽골 제국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정복자 티무르. 이 사람의 최후를 화려하게 빛낸 전투가 바로 오스만 투르크에게 치명타를 가한 앙카라 전투이다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는 오스만의 수도인 부르사를 약탈하고, 진로를 남쪽으로 돌려 당시 로도스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요새 스미르나(현 지명은 이즈미르)로 향합니다.
    부르사는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있는 터키의 대도시이다. 터키 내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가장 산업화가 이뤄진 대도시이다. 1335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된다. 지금 인구는 190만명이다
    1402년 티무르는 스미르나를 함락하고 로도스 기사단을 영구히 축출한다
    오스만 술탄이 7년 동안이나 포위했어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스미르나를 티무르는 고작 2주도 채 못 되어 정복해 버렸다
    만일, 티무르가 앙카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소아시아 반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면 오스만 왕조는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입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다면 훗날의 대제국 오스만도 성립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앙카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티무르는 곧바로 본거지인 사마르칸트로 돌아갔고, 10년 동안 비틀거리던 오스만 투르크는 곧바로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서, 결국 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맙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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