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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상 황희와 맹사성역사 한국 2021. 8. 29. 09:16반응형
명재상 황희는 1363-1452년 89세 사망
세종이 절대적으로 신임한 명재상이다. 성격이 원만하고 존경받는 청백리로 시문이 뛰어나다
키가 크고 풍채가 잘 생기고 눈이 무섭다. 총명 민첩 기익력이 우수하고 글 공부에 열심이다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다
들판의 소를 보고 어느 소가 더 일을 잘 하냐고 농부에게 묻는다
농부가 귀엣말로 누런 소가 검은 소보다 일을 더 잘한다고 하자
무슨 큰 비밀이냐고 귀엣말을 하느냐고 묻자
농부가 답하길 " 모르는 말씀 마시오. 말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자기를 욕하고 흉보면 기분이 상하게 되는 것이오"
여기서 얻은 교훈은 지금 열심히 일하는 입장에서 어느 소를 일 잘한다 못한다 하는것은 나쁘다는 것이다
1382년 19세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재상직을 폐지하고 자문기관인 전각대학사를 설치한다. 관료 집단에 대한 견제다
1385년 22세 진사시 급제
1389년 26세 별장 근무중 문과 과거 급제
1392년 29세 고려가 멸망하자 은거한다
두문동 72현중 한명으로 개성 두문동에서 안 나온다. 고려에 대한 지조때문이다. 이성계의 요청에 가장 나이 어린 황희가 출사한다. 젊어서는 바른 말 언사로 인해 벼슬과 파직을 반복한다.
이성계의 부름으로 성균관 학관을 거쳐 혀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이조 찬서, 영의정 부사가된다
1400년 37세 형조, 이조, 예조 , 병조 정랑
1401년 38세 승추부 도사, 병조의랑
1404년 41세 우사간 대부, 왕명의 출납을 하는 승정원 좌부대언,
태종때 정승 박석명이 자신의 루임 지신사 (비서실장) 으로 천거해 출세 가도를 달린다
사람 쓰는데 매우 신중한 태종이 박석명의 추천이 아니라면 황희를 중용하지 않앗을 것이다
1405년 42세 태종의 신임을 얻어 왕명을 출납하느 승정원 지신사가 된다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삼공의 반열에 오른다.
1408년 45세 형조 이조 예조 병조 판서 (장관)
1409년 46세 함지의정부사. 형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1410년 47세 지의정부사
1411년 48세 병조판서
1413년 50세 예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1416년 53세 공조판서, 유사시에 대비해 조선 8도에 비치된 군사와 군수물을 일일이 점검 보고한다
세자 양녕대군의 폐위에 반대한다
1418년 55세 한성부판사 (서울시장)
충녕대군 (세종)의 왕세자 책봉에 반대하고 폐서인이 되어 교하 (파주)로 유배간다
세종이 즉위하자 남원으로 유배를 가 5년 유배를 산다.
상왕 태종의 건의로 세종이 복직시킨다
1422년 59세 관직 복귀되 의정부 좌참찬., 세종이 끝까지 중용한다.
국가 미래를 보는 정확한 판단력과 아니다라고 말하는 강단이 있어 이도 좋고 저도 좋다는 호인만은 아니다
실록에 의하면 매관매직으로 돈을 받아 먹고 남의 아내와 간통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끝까지 중용한다
1423년 60세 예조판서, 강원도 관찰사
1425년 62세 사헌주 대사헌
주나라때 선정한 문왕의 서자 소공에 비유되 그가 강원도 삼척에 가니 주민들이 그를 기려 그가 머물던 곳에 대를 쌓고 소공대라고 부른다. 지금의 정승고개다.
미복 차림의 세종이 집을 방문하고 그의 청빈한 삶에 감동된다. 정승이 멍석을 깔고 밥상도 누런 보리밥과 된장 고추뿐이더라.
1426년 63세 이조판서 우의정
1427년 64세 좌의정 평안도 도체찰사
1428년 65세 박포의 아내와 간통 혐의를 받는다. 박포의 난으로 박포가 처형되자 그녀가 황희 집 뒤에 토굴을 짓고 은신한다
1430년 67세 탄핵 파직
1431년 68세 복직 영의정부사
1449년 87세 은퇴ㅡ 3년후 사망
세종은 비만 체구로 운동을 싫어하고 육식과 학문을 좋아한다
평생 동안 당뇨에 시달린다. 종기 소갈증 풍질 안질 등에 시달린다
세종은 황희때문에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긴다
의정부 영의정 황희는 농사개량, 예법개정, 국방강화, 김종서 최윤덕을 중용해 4군 6진을 설치한다
양반 자손중 천첩 소생의 천역을 면제한다
자신의 세력이 없다. 군주권이 안정되고 오랜 재상직을 수행한다
" 차라리 형을 경하게 실수할지라도 억울한 형벌을 할 수는 없다"
형관들의 남형 금지 조항을 신설한다. 반드시 관청의 허가를 받고 소나므를 벌목하게 한다. 소나무 남벌 금지령,
지역 수령들의 근무 실적을 조사해서 태만한 수령은 처벌한다
각도에 뽕나무를 심어 식량과 의복재를 손 쉽게 구하게 한다
명재상 맹사성은 1360-1438년 78세 사망 (홯희 정승보다 3살이 많다)
세종의 측근으로 세종때 재상을 한 사람은 황희 맹사성 윤회 권진등이다
1386년 26세 문과 급제., 춘추관 검열, 전의시승, 기거랑, 사인, 우헌납
1387년 27세 고려 우왕때 고려국 전의시승
1392년 32세 태조때 예의좌랑, 간의
정종때 우산기상시, 동부대언, 이조참의, 예문관 제학
1408년 48세 사헌부 대사헌,
역모 사건 취재중 태종에게 보고도 안하고 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을 고문한다.
왕과 왕족 능멸 죄로 처형되기,직전 영의정 황희와 성석린의 도움으로 살아 남는다
1416년 56세 이조참판, 예조 호조 판서
1417년 57세 충청도 관찰사,
1418년 58세 이도 세종 즉위. 공조판서, 좌의정
1419년 59세 판한성부사,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1421년 61세 의정부 찬성사, 좌의정
향악을 정리하고 팔조지리지, 태종 실록을 편찬한다. 강호사시가를 짓는다
하인 노비에게는 관대하고 중요 고위직 인사에게는 엄하게 대한다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하고 자신의 후임자로 천거한다
공자가 말하길 삶이란 도덕에 근거해 인애에 의지하고 예술 경계를 노니는 것이라고 햇다
법치보다는 예치를 추구해 예약에서는 예의와 음악을 중시한다.
예악을 정비해 전통 음악과 중국음악을 (박연) 조화 융합한다
1433년 73세 세종이 1.5만 대군을 동원해 파저강 유역의 여진을 정벌한다
주화파인 영의정 황희, 우의정 권진에 대항해
좌의정 맹사성이 주전파 최윤덕을 적극 지지한다.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삼는다
격무에 시달리던 세종이 질병 치유차 온양 온천욕을 자주 가는데 맹사성이 이에 일조를 한다
맹사성은 인간성이 소탈하고 조용하다. 효성이 지극하고 사심이 없다 ,엄하지가 않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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